조선 복숭아
복숭아가 한창인 계절인가 보다. 요지음은 개량종이 많이 나와서 황도니
백도의 대표적인 말도 별 반응이 없는 시대이다.
시장에서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복숭아를 보며 스치다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해방이 되고 정부가 성립되어지면서 나라는 어지럽게 돌아가고 공
산당이 설치던 그러니 6.25가 나던 전해다. 나에게는 여동생과 남동생 있었
는데 막내는 지금은 남동생 하나이지만 실은 그는 이란성 쌍둥이다.
먼저 나온 것은 여자이고 나중에 나온 것이 지금의 남동생이다. 누나인
큰애는 튼실하고 똑똑하고 이쁜데 나중 나온 동생은 영 몸이 약하여 둘은
두어 살 차이가 난 것 같이 달랐다. 그러니까 6.25가 나던 전해 4살 3돌이
지난 때다.누이의 이름은 선교(善嬌)인데 어찌나 극성스럽게 동생을 생각
하는지 어른들이 혀를 내 둘릴 정도이다. 먹는 것 입는 것 무엇이던지 동생
이 우선이 되어야하고 약한 동생을 보호하는 생각이 큰 누나 같은 모성애
같기도 하였으니 동네 소문이 날만도 했다.
한 동네 아래쪽에(1킬로 정도 떨어진) 외가집에 아주 오래된 조선복숭아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매 해마다 먹음직스러운 복숭아가 익어서 쩍쩍 갈
라져 빨간 빛으로 입맛을 돋게 하는 일들은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어느 날 동생이 울며 복송아 이야기를 하니까 어린 누나가 꼬불꼬불한 먼
길을 혼자가 외할머님께 동생이 우니 복숭아를 따 달라고 졸라서 한 개라도
더 갖고 올 욕심으로 작은 밥그릇에 고봉으로 담아서 1킬로의 거리를 하나
흘리지 않고 들고 오는데 행여 떨어뜨릴까 까치발로 긴 시간을 소비한
일이 동네 할머니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동생에 대하여 극성을 떨던 교가 그해 병이 들어 가을에 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해 6.25남침에 의하여 피난을 떠나야 하는데
남동생은 내가 업고 수 백리를 걸어야 했고 아이들의 이동이 어려운 것을
짐작하여 누이가 동생을 위해 먼저 자리를 떠났다는 우스운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기도 했다. 똑똑한 놈은 일찍 죽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나는 가슴 아픈
여동생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복숭아가 고운 색깔로 시장에 나오는 시절이면
어김없는 밑그림으로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 달콤새콤한 조선복숭아의
맛을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른다. 갖가지 향료에 입맛을 빼앗긴 풍요한 요즈음
더욱 이런 우리의 옛것에 대한 추억이 없다.
갈라진 속살에 복숭아벌레가 있어도 털어버리고 맛있게 먹던 옛 시절,
가난하고 먹거리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벌레 많은 복숭아를 먹기를
꺼리는 아이들을 위해 복숭아는 어두운 밤에 먹으면 이쁘게 되고 처녀들은
좋은 낭군을 얻는다는 유머도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공해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복숭아의 이야기에 떠 오른 동생 교의 마음이
우리민족이 가지는 순수함이 아니었을까 그 영혼이 지금
아름다운 별이 되어 비치고 있을 것 같다.
이 부도덕한 형제애나 가족애 같은 것을 보며 안타깝게 반짝이며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듯하다.
그제 늦은 밤 TV에 치매 걸렸다는 이유로 아들이 철장을 쳐놓고 아버지를
하루에 건빵 한 봉지와 물 한 병을 주는 불경스러운 프로를 봤다.
남의 일 같지 않게 눈물겨운 순간을 구조대에 의하여 구해져 병원 요양
시설로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누구의 죄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 작은 복숭아 하나라도 우애와 효도를 다하던 그
옛날의 사건들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것은 촌스러운 것일까.
피난길이 어려움 때문에 진즉 잘 갔다는 생각을 하며 고마워하던 내 생각이
오늘은 부끄러운 사랑으로 다시금 깊은 상처처럼 내 깊은 마음의 바닥
에서 솟구쳐 올라오고 있다.
쩍쩍 갈라지는 새빨간 조선복숭아 속처럼 핏빛이 되어.
청학 수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