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있는 곳

시인 이육사 생가(生家)를 가다

靑鶴(청학) 2016. 7. 23. 20:18
    
시인 이육사의 생가를 가다 글 : 박동수
- 이육사 (1904 ~ 1944) - 본명 ... 이원록(李源綠) 자는 태경(台卿) 호 이육사(李陸史). (二六四) 등단 작품 .. 1933년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함으로 등단 1946년 그의 동생 이원조가 그의 유고시집으로 "육사시집"출간으로 많지 않는 그의 작품이 남아 있다. 1904년 경북 안동시 도산면(백운로525)에서 이퇴계 14대손으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고 19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학을 익힌 것으로 기록되었다. 1925년에 젋은 나이로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함으로 항일운동을 하며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며 1931년 북경으로 가 조선군관학교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을 거처 조선군관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 하였다고 한다.(인터넷 인물 검색으로 많은 기록을 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 "청포도"를 통하여 시대적 배경과 그의 섬세한 심성과 작가적 애국과 원대한 조국의 안위를 염원함을 잘 찾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시인의 통찰은 가슴 아픔으로 그 이루기 힘든 시절의 애환들을 애틋한 감성으로 표현한 "청포도"는 그의 고향 생가 입구 시비에서 읽을 수 있었지만 동일한 시인의 길을 걷는 나로서는 그의 가슴으로 흐르는 속눈물을 익히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의미 있게 생각된다. 시 "광야"는 조국 광복을 위해 중국 땅 넓은 광야를 헤매며 느낀 시상으로 좀처럼 이루기 힘든 조국의 광복의 날을 후세 바로 "초인"에게 전승, 확인 하려는 염원이 담긴 의지를 노래했지만 시 "청포도"는 그의 고향의 어린 시절 뛰어 놀던 배경을 그리워하며 그 가슴 여린 시절의 눈 여겨 본 푸른 포도를 인용하여 그에게 좋은 꿈을 이루어 줄 "바라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여 청포도처럼 싱싱하게 맑은 조국을 넘겨주리란 희망을 담은 애틋한 그의 심성과 조국의 독립을 이룩하려는 뜻을 향토색 짙은 시어들로 표현 되어 있다. 그의 아호 필명을 보면 "二六四" 그것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수인번호였다고 한다. "이육사(二六四)" 일제로부터 광복을 염원하려는 한이 어린 슬프고 슬픈 필명이다.
청포도 / 이육사
내 고향 7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돋 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젹셔도 좋으련만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우연하게 한 아파트에 사는 그의 후대의 한 분(이*원)과 친분이 생겨 올 여름 휴가를 안동 도산면 시인의 생가 지역으로 가는 기회를 얻었다. 마침 안동시에서 이육사 문화관 공사가 한창 이었지만 그의 생가는 방문할 수 있었고 이 생가 주위는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것보다는 말끔이 정돈되어 있다. 그곳에서 그의 고명딸인 이옥비(李沃非.75)여사를 만나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곱게 생긴 이옥비여사는 대구에서 생활, 시간 나는 대로 그의 생가에서도 머물고 한단다. (이육사의 가족사를 볼 수 있다. : http://blog.daum.net/kangilee/18081505 :)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선대의 아련한 기록들이 오히려 그의 가슴에 엉킨 슬픔일 듯 한 그늘이 눈가에 비치는 듯도 하였다. 시인의 어린 시절에 이 생가 주위에 청포도 나무가 자랐는지는 몰라도 지금 생가 주위에는 청포도를 정성들여 심어 둔 것을 보고 왔다. 작가의 가슴에는 항상 그의 고향집 뒤 결에 주렁주렁 달린 청포도가 꿈의 그림처럼 보였을 그 그리운 시간들, 시상들이 출렁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고향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눈에서 사라지는 것일 뿐 가슴속으로 숨어드는 것이다. 고향을 아는 사람은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말하면 정서적으로 안정을 갖는 힘을 더 얻을 수 있고 어려운 순간에도 희망을 더 갖일 수 있다고 한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고향이 없는 쪽이 더 많다. 안정된 생활을 위해 근거지를 자주 바꾸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거의 정서적 결핍이 많은 이유 중에 하나인 듯하다. 정서적 요소가 부족함으로 사회생활이 거칠어지는 것도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시인이 겪은 일제 점령기의 우리의 삶은 무서운 고초와 더욱이 고향을 떠나 외로운 삶을 이어가면서 오직 조국의 안녕만을 위하여 투쟁하는 희생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시인의 것처럼 조국과 고향이 있었기에 극복을 하며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리. 그들 마음속에는 잃어버린 듯한 고향이 잠재 되어 있었기에 안정을 얻으며 생활 하였을 줄 안다. 영어에는 고향을 본(born)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봤다. 처음은 이해를 못 했으나 그것이 태어남을 말하는 것이었다. 즉 태어난 곳. 본의 뜻은 뼈다. 말해서 뼈가 만들어진 곳을 의미하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표현인가? 우리는 뼈가 만들어진 곳 고향을 잊을 수 있겠는가? 시인 이육사는 먼 타향 중국 감옥에서부터 죽음을 당한 것이지만 그의 작품과 정신은 고향을 찾아 지금도 생생히 우리들 곁에 있음을 느끼는 곳이다. "민족의 시인" 이런 거창한 이름보다는 그는 나라를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애틋한 미소를 지으며 정이 듬뿍한 향수의 시인으로 알려 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뒤로하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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