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일 한 가슴 미여 짐을 막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내가 만일 병든 생명 하나를 고칠 수 있다거나 한 사람의 고통을 진정 시킬 수 있거나 할딱거리는 새 한 마리를 도와서 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E.디킨슨.......... ================= 혼돈의 시대 모든 것은 숫자적 개념에 의하여 믿어지는 그리고 판단하는 시대에 사는 것 같다. 돈의 액수, 그리고 권력의 숫자적 높낮이, 주고받는 사람의 사랑도 어떤 외형적 수에 의하여 판단에서 평가되는 세대. 예수의 부활도 옆구리의 상흔을 만져 보고 믿는 현실주의의 도마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대 즉 언어(문학)의 상실의 시대가 아닌가 싶다 해면으로 흘러오는 파도의 외형으로 바다를 정의하고 그 깊숙이 깔려있는 은밀한 미소라든가 은밀한 소리를 탐색하려는 사색의 고통은 하려 들지 않은 시대라고 하면 틀리지 않은 시대 사색의 가치가 붕괴 되여 지는 현실에 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언어의 분실을 절실이 느끼고 있지 않은가 싶다. 언어로써의 척도는 외형이 아니라 잠수복을 입고 생명의 내 류 속을 헤엄 치며 그 속에 잠재 되어있는 은밀한 희로애락을 탐색해 냄으로 그 가치관을 드러내어 주는 것 일 것이다. 그러나 혼탁한 정치 도덕성 공해의 소리들로 인해 고독한 언어의 가난함과 절망스러움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절망감은 어떤 좌절감을 느끼고 있을 듯도 하다. 그러나 그 속에 있다 해도 절망해서도 안 된다. 군중들과 함께 했다고 해서 휩쓸려서도 안 된다. 혼탁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귀를 열고 눈을 열어 그 혼미한 중에서도 미세하게 부르짖는 소리나 사소한 율동들을 들을 수 있는 예민한 청각을 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 신의 아들 예수가 혼돈의 세월 속에 처한 유대인의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죽음으로 그 무리들을 구원의 길을 열 수 있음을 알고 십자가를 택함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과 더 귀한 부활의 진리를 안겨 주었듯이 글 쓰는 사람들의 고통이 크다 할지라도 군중들과 함께 스스로의 상흔을 만들어 예수의 상처를 만져보고 현실을 믿으려는 도마 같은 군중에게 믿을만한 상흔을 보여 주는 것이 사명이 아닌가도 생각 해본다 그렇다고 언어의 정의가 소멸해가는 군중에 구원의 구조선이 된다고 생각 해서는 안되지만 갈아 앉는 난파선의 부표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글을 쓰는 이들이여! 순간의 안위를 위하여 노아의 방주를 찾기 보다는 최소한의 순교적 정신으로 혼탁 된 군중들 속에서 침묵의 언어를 구사하며 4월의 계절을 아름다운 부활의 신성함으로 인도해 줄 수 없는가? Music : Via dolorosa(고난의 길) / Sandi patty |